시간의 흐름속에서/삶에 대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에서 6월의 소고(小考)

카프1 2008. 6. 9. 15:45

매년 6월이 시작되면

나는 빚을 진것같은 느낌이 들고 마음이 무거워 진다.

현충일을 지나야 점차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게 된다.

 

1982년 이후 매년 6월6일 현충일이 되면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관옆 27묘역에 누워있는, 나의 군대동기 이도수 하사를 보기위해

12시에 동기의 묘비 앞으로 간다.

그렇게 해온 지가 벌써 27년째 이다.

 

이번 현충일에는 사정이 있어, 작년처럼 하루 전날인  6월 5일에 나홀로 동기의 묘비를 찾았다.

현충원 입구에서 아담한 국화꽃 바구니를 사들고 걸어 가다보니, 내일 행사준비로 분주하다.

 

동기의 묘비앞에 이르러 꽃바구니를 비석앞에 놓고,

미리 써간 편지를 흰색봉투에 넣어서 그 위에 올려놓았다.

내일 대구에서 도착할 도수 의 누님과 매형,

그리고, 매년 현충일에 이곳을 찾는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군대동기들에게

글로서 라도 안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개를 숙여 잠자고 있는 동기에게 인사를 했다.

 

 

날씨가 흐려서 비가 조금씩 흩뿌리기도 했다.

27년전 그날,

동기를 이곳에 영면 시키던 그날도 국립묘지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었다.

나무로 만든 임시비석앞에 파 놓은 묘혈에는 빗물이 흥건히 고였고, 

남아있는 11명의 동기들은 판초우의 위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영면할 동기를 위해

급히 배우느라 서투른 찬송가 였지만  모두들 열심히 불렀다. 

 

1981년 7월의 어느 날

때마침 정기 휴가로 집에서 생일상을 받고 있던 나는 이도수 하사의 사고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이 하사가 근무하던 진지로 달려가 영결의식에 참석하였다.

 

서해안과 가까운 한강하류에 근무하다 보니, 폭우로 불어난 물이 내무반을 덮쳤고,

무엇인가 건져내기 위해 강물에 뛰어 든것이 마지막 모습 이라고 했다.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두번 인가 물밖으로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시간이 흐른뒤 해안가에서 어부의 손에 주검이 발견되었고, 가매장 되었다가 부대로 인계 되었다.

육안으로는 확인이 어려워, 입고있던 속옷의 상표가 신분을 확인 할 수있는 증거가 되었다.

학창시절 소년단 활동으로 의협심이 강했던 친구였다.

위험스러워 누구도 하기 꺼렸던 일을, 분대장으로서 용감하게 뛰어 들었다고 했다.

이하사가 생활했던 내무반 에는, 잘 접어놓은 전투복과 유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잔뜩 흐린 날씨가 사고 당시를 떠올리게하여 기분이 울적해 졌다.

현충원 이곳저곳을 조용히 걸어 보기로 했다.

인파로 붐빌 내일을 피해 하루 전날 이곳을 찾은 유족들이 군데군데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충원 본관앞에서, 내일 현충일 추념식 중계방송 준비로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각군 사관학교에서 나온 버스도 보였고, 순찰중인 수방사 소속 헌병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명용사 탑을 지나 서서히 걸어서 나오는데, 펼쳐진 잔디밭위에 행사용 의자를 넓게 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간에, 현직 대통령인 "국군 통수권자" 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 를 다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행정부의 장관들은 일반국민의 경우와 비교해 볼때 훨씬 높은 병역면제율을 보이고 있다. 

내일은 현충일이고, 그들은 방송중계차가 준비되어 있는 국립묘지를 찾을 것이다.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도 못한자 들이, 의무를 다하느라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위한 행사에 

정부를 대표하여 참석 한다" 고 생각하니  무언가 질못 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 지고 있다.

이건 블랙 코미디다.

 

 

6.25때 산화한 전사자 유해를 찾는다는 입간판 뒤로 펼쳐진 넓은 잔디밭 위에서

병역이 면제된 대통령을 위한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흐린 날씨 속에서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순직한 동기는 나와 함께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서 일반 하사로 차출되어,

여산의 제2하사관 학교까지 구보로 뛰어가며, 무사히 제대하자고 웃으며 약속했었고,

10주간의 힘든 보병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14주간의 후반기 주특기 교육을 위해 1980년 5월 16일 광주 송정리 역에 내렸다.

그리고, 극락교를 건너 상무대 포병학교까지 힘차게 구보로 뛰어서 갔다.

 

입소하자 마자 터진 "광주사태 (이제는 광주 민주화운동 )" 로 인해,

포병학교 둘레를 경계하게 되었고, 야간에는 더욱 삼엄한 경비업무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전 교육생은  5분대기조 복장으로 교육출장을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우리는 전투복에 군화와 철모를 착용한 채로, 관물대 밑에 머리를 두고

불편한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선배기수들이 출동을 하였다.

몇일 뒤 우리들도  30발의 실탄을 배급받은 뒤,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채로 내무반 한켠 총기보관대에 세워져 있던,

미국 콜트사의 M16 소총을 들고 포훈장에 집합 하였다.

다른 과정에 교육중이던 교육생들도 모두 나와 포훈장을 가득 채웠다.

포훈장에는 이미 우리를 실어나를 군용버스와 트럭이 꽉 들어차 있었고, 투스타인 포병 학교장의

훈시가 이어졌다. 긴장이 온몸을 조여왔다.

드디어 출동명령이 떨어지고 아직 교육생 신분이었으나 광주 외곽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엄군으로 투입되었다.

 

우리는 건빵 한봉지와 함께 광주 광산 경찰서에 내려졌다. 

경찰서의 무기는 모두 탈취 당한채, 무기고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때 보았던 흰색의 두꺼운 메트리스가 깔려 있는 강당에 집합 하였다.

저녁때가 되어서 이미 탱크가 세워진 채로 이동이 통제된 광주 비행장 앞 도로에 도착했다.  

경계업무를 부여 받은 뒤 철길을 따라, 산아래에 배치 되었다.

탄창을 삽탄한채로 경계임무에 들어갔다.

M16 노리쇠만 당겼다 놓으면 실탄이 장전되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내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헬기의 굉음, 계속 지나가는 군용트럭의 불빛을 보며 사태를 짐작 하였고,

P-77 무전기에서 흘러 나오는 무장폭도(당시의 호칭)들의 이동정보를 들으며, 입대하자 마자

조국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왔다. 

밤을 지샌뒤 아침이 밝았고, 철모를 베고 도로위에 누워 식사차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간뒤에, 광주사태는 진정 되었고 우리는 "국난극복 기장" 을 받았다.

전역후 캠퍼스로 돌아 왔을때, 매년 이어지는 데모를 지켜보며 

나는 "국난" 과 "민주화 항쟁" 사이의 "인식의 혼돈" 속에서 한동안 힘들어 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내고, 서부전선 최북단에서 힘들게 고생했던 나의 동기는 20대 초반,

젊은 그때의 미소띤 얼굴로 잠들어 있는데

 

우리가 헤쳐온 고통위로, 국민의 신성한 의무조차 회피한 위정자들의 말잔치가  

난무 하는 듯하여 못내 마음이 불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