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고함/나의 이야기

명동(明洞)에서

카프1 2008. 9. 14. 20:27

내가 입대하기 전 에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곳은 대부분 명동이나 종로였다.

그 이후 강남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후로는 삼성동, 강남역 부근, 청담동, 압구정동

등으로 다양해 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명동에는 인파가 몰린다.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오전에 명동을 나가 보았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던 길에 시간여유가 생겨 옛추억을 떠올리며 이곳 저곳을 걸었다.

 

공사 중 이라는 안내가 걸린 중국대사관 (예전에는 중화민국 대사관) 안쪽의 학교에서는

유달리 목소리가 큰 중국선생님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전에 순두부를 먹으러 지나가던 대사관 앞길은 중국음식점들이 들어와 있고,

대사관 담장을 따라 걸어 나오는 골목길은 중국인민폐 환전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땅값이 제일 비쌌던 유네스코 회관을 좌측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을 걸어 보았다.

입대 전에 자주 찾았던 2층의 작은 카페는 그때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 유네스코 회관 옆길  

 

주방 천정에 나즈막히 찻잔을 길게걸어 놓았던 자그마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건너편에 양주이름을 따서 커티샥이라 했던 레스토랑은 자취를 감추었고,

젊음의 낭만으로 가득했던 당시 이학이란 상호로 유명했던 건물 2층의 나이트클럽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훼미리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시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라는 영화에서 존 트라볼타

멋지게 춤을추어 유명해진 디스코가 국내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나이트 클럽은 매일저녁 젊은이들의 환호로 가득했었다.

역시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25시음악사를 지나 골목 안쪽에 위치했던

또 다른 나이트클럽 회성도 상황이 비슷했었다.

 

당시 젊은이들이 즐겨 찾던 대형 명동보세의류타운도 흔적이 없고,

친구가 중동으로 출국하던날, 

공항으로 출발하기전에 지금은 그친구의 아내이지만

여자친구들과  커피 한잔을 했던 길건너 지하 찻집도 찾기 어려웠다. 

음료 한잔과 키 높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클래식을 듣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새로 지은 건물과 함께 사라지고 유명 캐주얼 브랜드 매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퇴계로 쪽에서 버스를 내려 신라제과 옆으로 내려오는 길에 있었던 신도피자

내게 피자라는 음식을 처음 접하게 해준 곳이었는데 그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설픈 사복차림으로 처음 미팅을 했던 2층의 그 찻집도 사라졌고,

즐겨 찾았던 명동 칼국수도 본래의 자리를 떠나 인근의 지하로 자리를 옮겼다.

 

추석을 앞둔 명동의 오전은 우리 농수산물 축제천막이 쳐져 있었고,

목소리 큰 중국인 관광객들이 지나고 있었다.

 

우리 농수산물 축제

 

그때 우리나이 또래인 자녀를 두고 있을 만큼 세월이 흘러갔으나,

내 머릿속의 기억은 그대로 예전에 머물러 있었다.

요사이는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많아진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정취와 낭만까지 사라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다가오는 가을 탓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