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속에서/삶에 대하여

천안함 승무원(乘務員)들을 위한 승무(僧舞)

카프1 2010. 4. 26. 20:43

업무상 기업체 상담을 위해 경기도 지역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최근에는 주로 용인, 화성지역의 중소기업들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는 동안에 다른 지역보다는 유독 이 지역에

위치한 기업체들을 자주 방문하였다.

전화로 상담을 하는 직원들이 이 지역을 주로 연결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 4월 중순경에도 이 지역을 찾아 상담을 하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을 하는 도중에

용주사(龍珠寺)입구에 걸린 천안함 병사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차를 세우고 경내로 걸어 들어갔다.

천안함의 불행을 온 국민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현수막을 내걸고 귀환을 염원하는

종교시설을 본적은 없었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나는 용주사라는 이름을 오래 전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승무(僧舞)” 를 배우면서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이 용주사 였다는 것을

국어 선생님께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도 새삼스러웠거니와, 역사적인 명소를 지나는 길에 들러 보겠다는

마음도  작용했다.

경내를 조용히 둘러 보며 합장도 하고 직접 내부로 들어가 신도들이 있는 곳마다 함께 절을 했다.

불전도 조금 넣었다. 평일이었지만 용주사를 찾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내가 바라는 내용을 빌기도 하였지만 천안함 장병들의 무사 귀환도 함께 염원했다.

 

용주사터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854)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가 있던 자리였다.

갈양사는 고려 광종 3(952)에 소실되었다.

갈양사는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설화와 유래가 깊은 절이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 일명 당항성) 토굴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다가 컴컴한 새벽에 갈증으로

주변을 더듬거려 바가지에 담긴물을 시원하게 마셨는데 날이 밝아 알고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이다.

의상은 당나라로 향하고, 원효는 발길을 돌렸다.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

하산 길에 화산에 들러 지세가 빼어난 이곳에 갈양사를 창건했다.

 

1790(정조14)에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하제일의

복지라는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후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였다.

이때 정조는 갈양사터에 능침사찰로서 용주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하여 용주사로

이름 지었다.

용주사는 전통적 가람양식이 아닌, 궁궐의 전각 배치방식을 채택한 독특한 사찰이다.

 

 

 

대웅보전 왼쪽에 있는 호성전에는 장조와 경의왕후,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호성전 앞에는 부모님의 공덕을 기리는 부모은중경이 서있다.

효가 어찌 정조 한 사람에게만 국한 된 일일까 마는 1976(정조20)에 정조는

불설부모은중경을 목판으로 제작하였다.

 

정조는 화성 행궁시에 억을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 하기 위한

진혼제를 열었다. 진혼제는 매년 10월에 열었는데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이고

정조의 이름은 산()이다.

부자간인 이선이산의 비극과 효심이 이곳 용주사에 자욱하게 서려있다.

 

이 진혼제에 선 보인 것이 바로 승무(僧舞)이다.

조지훈은 여기에서 <승무>를 지었다.

천안함 순직 장병들을 위한 진혼제를 대신하려 함 인가

그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현수막이 그렇게 용주사에 걸려있었다.

 

 

 

용주사 입구를 거쳐 들어오다 보면 왼편에는 효행박물관이 있어 후세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부모보다 먼저 떠나간 천안함 장병들의 불효를 어찌해야 하나!

1시간여 용주사를 돌아보고 걸어 나오는 데 천안함 장병들이 시신으로 돌아오게 된

안타까움을 지우려는 듯 어느 거사께서 무심한 표정으로 현수막을 걷어내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등 위로 무심한 4월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