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를 한일고에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던 때가
바로 어제일 같은데 어느새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이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아이 학년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벌써 졸업이다.
정말 빠르게 지나가 버린 구작 골의 3년.
기쁨과 걱정으로 점철된 시간 이었지만,
기대와 애정도 함께 했었다.
지난 3년을 정리해 본다.
내신 불이익이 염려 되었지만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2004년 초
아들을 통해 한일고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거의 매일 한일고 홈페이지에 들러
관심을 가지고 학교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았다.
당시의 중3부터 적용된다는 새로운 대입제도에 대한 학부모들의 걱정들이 무척 많았다.
한일고 홈페이지에 변경될 입시제도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지금도 홈페이지에 남아있지만,
답변해 주신
염려가 되긴 하였지만 “공부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다림에 거의 지쳐갈 즈음인, 12월초가 되어서야 합격통지를 받았다.
특목고나 외고에 지원하여, 이미 결과를 알고 있던 친구들에 비해,
긴 기다림 끝에, 듣게 된 합격 소식이었기에 아들의 기쁨은 무척 컸다.
합격소식을 전하는 내 전화에 아들녀석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일고로 달려가 합격증을 받아 든
나는 아이의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한일고 교정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고
입학식 날
들뜬 마음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제부터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 왔을 때,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각,
식당으로 오르는 계단 나무 아래에서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한 뒤, 얼른 뒤돌아서며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아이에게,
덕담을 해준 집사람은 차에 올라 한참을 힘들어했고,
나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교생활이 시작되고
입학이 결정될 때까지, 아들녀석은 내심 말도 못하고 무척 힘든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학교생활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여러 차례 다졌다.
신입생 학력평가에서, 중학교 때까지는, 한번도 접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으나,
신입생의 수준을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면 성공적 이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 1학년 봄 학교표지 석 앞에서
아들녀석은 자기가 했던 각오를 행동에 옮기려는 듯,
1학년 초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했고, 은상을 받았다.
발표순서가 밀려 식사도 못 하고 굶은 상태에서 얻어 마신 탄산음료 탓에
속이 불편해 제대로 말 하기도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생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아이가 생면부지의 객지에서
혼자 겪었을 고충을 생각하니 며칠간 마음이 불편했다.
성숙해 지는 과정이라고 생각 했다.
그 이후 외부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행사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신입생 100일제 행사를 하는 날
입학 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궁금하고, 내심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의 각오를 잘 알고 있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행사 전날, 전화한 아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가겠다는 이야기를 전했지만,
아이 얼굴을 본다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행사당일 친구들과 함께 준비한 영어연극을 보면서 아들의 애쓴 흔적을 보았다.
서툴지만 부모님께 보여드리려고 최선을 다한 아이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 신입생 입학 100일 잔치 때 영어연극
영어를 담당하신
아리랑TV “퀴즈챔피언” 프로그램에
친구들과 함께 4명이 조를 이루어 참가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된 아이들이 쟁쟁한 선배들과 겨루어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적처럼 연 5승을 거두더니,
5승팀 4팀이 겨루는 연말 왕중왕 전까지 진출하였다.
2학기 내내 주말마다 방송국, 집과 학교를 부지런히 뛰어 다녔다.
결과가 좋아서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교장선생님께서 축하전화도 해주셨고,
녹화 때마다 초조하게 지켜보며 애를 태웠다.
▲ 아리랑TV 퀴즈챔피언 방송장면 (팀명: Pioneers)
아들도 어릴 적부터 영어에 흥미가 많기는 하였지만, 같이 참가했던 친구들은
경험과 실력면에서 정말 상당한 수준의 학생들 이었다
아들에게는 영어에 계속 정진 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준 좋은 경험이었다.
전학을 고민 해 본적도
1학년을 마쳐갈 즈음, 내신 불이익을 걱정하는 몇몇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갔다.
남아서 지켜보는 아이들도 아쉬워했고, 아이들의 분위기도 뒤 숭숭 해졌다.
전학간 아이가 가자마자, 치른 시험에서 바로 전교2등을 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당시에 자주 볼 수 있었던, 특목고나 자사고의 내신 불이익에 관한 각종 보도를
접하게 되면서, 마음은 더욱 불안 해 지기만했다.
이러다가 정말 대학입시 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학교를 믿고 있었지만 불안해 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가 졸업한 중학교 학부모 중, 안면이 있는 현직 고등학교 대입상담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조용히 만나 뵙기를 청 하였다.
그 분은 이미 외국어고 에 다니던 자녀를 1학년 2학기에 일반학교에
전학을 시켜 놓았다.
한일고는 훌륭한 학교이고, 자기 제자도 한일고 출신이 있는데,
이번에는 예년과는 달리
새로운 대입제도로 인해, 예상되는 내신 불이익 때문에,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들이
대입 시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주셨다.
자신도 결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생각을 잘해보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왕 알아보는 김에, 지역의 명문이라는 사립고등학교 두 곳에 전화를 했다.
한곳은 교감선생님 다른 한곳은 부장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한일고 재학생이라니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두 학교 모두 정원과 상관없이 받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 학교에서 별도의 특별 반을 운영하며, 매일 자정까지
학습관리를 해주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판단을 잘 해서 우리보고 결정을 하라고 하였다.
근 일주일간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주말에 아들에게 가서 그간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의견을 물어 보았다.
아들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했다.
자기는 끝까지 남아서 한일고 졸업생이 되겠다고 했다.
자기는 아무 문제없는데 왜 부모님께서 그러시느냐고 했다.
자기는 부모님께서 전학을 주장 하실까 그게 더 걱정 이 되었다고 했다.
확신에 찬 아이의 말을 듣고 난 뒤, 여러 날을 고민했던 일은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바른 결정이었고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해준
아이가 믿음 직 스럽다.
2학년 봄 - 계룡산 등반대회
다소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지나면서 1학년을 마쳤다
1학년 때 와 마찬가지로 전대희 선생님께서 2학년 때도 담임이 되셨다.
아이가 귀성 때 하는 말을 들어보니,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학년이 막 시작된 따뜻한 봄날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학부모 등반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계룡산으로 학부모님들의 차량이 모여 들었다.
일부 학부모들께서는 버스를 대절 해서 단체로 오셨다.
산행은 중간에 쉬기도 하면서 선생님과 담소도 나누고,
선생님께서 미리 답사하신 코스를 따라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며,
계룡산의 봄 공기를 마음껏 마셔본 인상적인 행사였다.
다른 부모님들과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며,
아이와 떨어져 살며 느끼는 애환을 서로 나누며 걷는 산행 길은
한일고 학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별난 재미였다.
▲ 계룡산 등반대회에서 담임 전대희선생님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분)을 모시고
이런 행사는 한일고가 아니면 쉽게 생각 해 볼 수 없다.
주말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 하는 동안, 부모님들은 선생님과 지역의 명산인
계룡산을등반하고, 산행 후에는 학교 앞 에서 아이들과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다.
부모님들은 물론 선생님들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신입생의 입학 100일제 와 같이 학교의 전통으로
계속 이어져도 좋을 행사라고 생각 했는데
이후에는 부모님들의 등반 소식을 듣지 못해 무척 아쉽다.
학교가 더 편해지기 시작하고.
2학년 초까지도 전학간 친구들로 인한 후유증으로
아이들의 분위기는 약간 처져 있었다.
1년을 함께한 친구들의 빈 침대를 보는 것도 힘든 것 같았고,
주위에서 들리는 풍문에 따라,
아이의 감정도 기복이 심해졌다.
전화 때 마다 아이의 짜증이 느껴졌다.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였다.
그때마다 본인이 좋아하는 영어의 실력을 다져두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2학년 때가 아들이 가장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지만,
또 가장 힘들어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의 감정에 따라 부모입장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화 때 아들녀석의 목소리나 분위기에 따라, 기쁨 과 근심이 수시로 교차했다.
문. 이과를 선택할 때, 아들은 적성이 맞는 것 같다며
문과를 선택 해야겠다고 했다.
1학년 때 뛰어난 친구들과 공부를 해보더니
중학교 때와는 다른 세상을 느낀 것 같았다.
수학에서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고 했다.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아이의 내면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아들의 우울한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고,
자신감도 조금 약해 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주기적으로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편지에 써본 적은 없다.
매일 책과 씨름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니 최선을 다하라는 소리뿐
애를 태우며 한일고 합격소식을 기다렸던 때를 기억하고,
각오를 다졌던 초심을 잃지 말라고 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모으면,
웬만한 주간지 한 권 정도는 될 것 같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토끼는 거북이 에게 진 것이 아니다.
토끼는 자기 스스로에게 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자신 과의 싸움이다.
만약 토끼와 거북이가 바다에서 경주를 했다면,
우리가 아는 승부와는 정 반대가 될 것이다.
네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가지고
경기장을 네가 유리한 무대로 만들어 가라.
이렇게 편지에 썼다.
독수리는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풍을 이용해 더욱 높이 날아 올라 온 세상을 내려다 보며,
날카로운 눈으로 먹이(목표)를 찾아 돌진한다.
그래서 하늘의 제왕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흰머리독수리” 인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졸업 후에 다가올 너의 찬란한 비상을 생각 해라.
이렇게도 썼다.
보답이라도 하듯, 아들녀석도 농구부, 유도부, VANK동아리 활동을 비롯한
교내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자신의 각오대로 학교생활을 정말 열심히 해나갔다.
친구들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 해 줄 것은 인정하고,
자신의 장점도 적극적으로 살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더니
아이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 이제는 학교 생활이 더 편해요” 라면서
학교에 완전히 적응 하는 모습을 보여
부모의 마음을 한층 편하게 해주었다.
스스로 정보를 찾아 금연영어 웅변대회도 참가하고,
관심분야가 같은 친구들과 영어연극대회에도 참가 하더니,
개인적으로는 최우수상(국가청소년 위원장상) 과
단체참가 에서는 대상을 수상하는 등
노력하더니 좋은 결실도 맺었다.
정안중학교 학생들 에게 영어를 지도해 주고 상담도 해주는 멘토링 활동도하고,
봉사활동 때 복지시설을 방문해 신체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는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져 갔다.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 느끼게 되었다며,
자기는 참 행복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자기는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많다고도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고맙다고.
▲ 충청남도 “잉글리쉬 업 경연대회” 영어연극부문 대상
한일고를 선택한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공부 이외의 중요한 그 무엇” 은 바로 이런 것 이었다.
시간이 불필요하게 낭비되지 않도록,
귀성이나 귀교 때는 대부분 직접 데려다 주었다.
집에 데려올 때보다 학교에 내려 주고 돌아오는 길이 더 힘들었다.
귀교 때는 솔직히 혼자 보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안에서 버스를 내려 학교까지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가야 할 아이를 생각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차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전달 할 수 있는 둘 만의 공간이 되었다
한번에 2~3시간씩 꽤 많은 시간을 아이와 단둘이 보낸 셈이다.
간혹 조용해져서 뒤를 돌아 보면 아이가 잠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방해 되지 않도록 음악소리를 줄여주고 운전도 조심했다.
지금도 아들과는 격의 없는 대화를 한다.
큰 소득 인 셈이다.
부모의 마음이란..
2학년 2학기에 들어와
아이의 마음이 느슨해 지는 것 아닌가 하는 징후가 보였다.
물어보면 본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학교행사로 참가한 케이블TV주최 “러브스쿨 투어” 행사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모의 여성그룹 공연도 보고,
사진도 찍고
농구경기도 함께 하더니
마음이 뒤숭숭 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실수가 좀 있었다고 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럴 즈음에 아이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 러브스쿨 투어행사의 농구경기
“내일부터 기말고사 인데, 배도 아프고 몸도 안 좋다” 고
회식을 마치고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와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부산해졌다.
날이 밝으면 바로 시험 이라는데,
걱정스런 마음으로 집을 나와 다시 사무실로 갔다.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
완성하지 못하고 노트북에 저장해 두었던 편지를 마무리 하여 출력한 뒤,
주저 없이 차를 달려 한일고에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입학상담실 앞에 주차하고,
구작관 쪽을 보니 문과 반 2개 교실은 불이 켜져 있고,
이과 반 교실은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혹시나 해서 아이 반 교실로 갔더니
얼굴을 알 것 같은 학생 2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
한 명은 졸음을 쫓으려는 듯 교실 뒤쪽에 서서 책을 보고,
한 아이는 책상에 앉아 열심히책을 보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교실에 남아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조용히 교실에 들어서자, 뒤에 서있던 아이가 나를 보며 얼른 인사를 한다.
“이제 자야지 내일이 바로 시험인데, 힘들지 않니?”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더니
“네 시험공부를 많이 못해서요” 한다.
공부에 방해 될까 봐
차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초가을 새벽 추위가 엄습한다.
그냥 몸을 움츠리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6시가 되기 전인데
부지런 하신 영어선생님이 자전거를 끌고 아침운동을 나가신다.
시험 때라 그런지 평소보다 약간 늦게 기상한 아이들이
사감선생님의 통제로
1학년부터 3학년 순으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우리는 큰 그릇”을 합창한다.
피곤에 지친 목소리로.
아침점호가 끝나면 편지를 전달하고, 얼굴만 보고 출근하려 했는데
점호가 끝나자 마자
아들녀석이 갑자기 뛰어 호실로 올라가 버렸다.
먼 발치에서 보고 있던 나는 당황하여,
덩달아 뛰어서 호실로 갔더니 아이가 없다.
호실 입구에서 복도를 분주히 오가는 아이들 눈치를 보며
기다리고 서있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들 녀석이 속옷차림으로 날 보더니
“어! 아빠” 하면서 흠칫 놀란다.
즉시 휴대폰을 꺼내 집사람과 통화를 시키고
편지를 꼭꼭 접어서 전해준 뒤,
“아프다고 해서 왔다. 몸은 괜찮니? 아빠 간다”
아들녀석 엉덩이를 한번 두드려 주고,
채 5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어둠이 막 걷혀가는 교정을 빠져 나왔다.
2학기에 아들녀석이
장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부모의 근심만큼 아이들이 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를 향해서
3학년이 되었다
한일고의 특성상
다른 학교에 비해 내신이 불리하기는 하겠지만,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 했다” 면
어떤 결과든 만족 하겠다고 했다.
아이가 집으로 전화하는 빈도가 전보다 잦아졌다.
불안해 지는 마음에 부모에게 위로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라 생각했다.
가능한 주말마다 아이를 만나 식사를 같이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신경을 썼다.
주말에는 가능한 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다.
한일고에 가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금강 변을 달려 기분전환 삼아 드라이브도 해주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하는 분위기로 팽팽한 긴장의 끈이
가슴으로 전해왔다.
선생님께 아이의 정신무장을 부탁 드리기도 했지만,
늘어나는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TOEIC 만점과, TEPS 에서도 만족스런 결과를 얻어
다소나마 근심을 덜었다.
공부에 지치면
설립자 묘소가 있는 학교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정리 하라고 제안을 해주었다.
늦은 자습을 끝내고 호실로 가는 길에
설립자 묘소에 올라가 밤하늘을 보니
빛나는 별들이
참 아름다웠노라고 했다.
그 후로도 종종 그렇게 하였다고 했다.
나도 학교에 가면, 뒷산으로 설립자 묘소를 찾아,
훌륭한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신데 대해 감사했고,
아들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길 빌었다.
처음 한일고에 입학을 시키려고 결심했던 배경에는
설립자의 정신과
교풍이 상당히 작용했음이 사실 이었다.
아들도 그런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아이가 집으로 전화를 하는 횟수가 더욱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나의 마음도 따라서 부산해 졌다.
수능 일이 다가오면서 아이도 심리적으로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의 근심도 늘어갔다.
주말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저녁시간 에도 학교를 찾았다.
한번은 아이가 집에 전화해 감기기운이 있다고 했다.
사무실 근처의 “죽집”을 찾아 주문 한 뒤,
시간에 맞추어 포장해서 학교로 갔다.
무성관 옆 조용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함께 식사를 했고,
감기는 별탈 없이 지나갔다.
저녁 9시부터 10분간의 간식시간을 이용해
잠깐씩 이라도 아이를 만나 격려 해 주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수능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 지고
마무리 공부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상투적인 말을 반복 할 수 밖에 없었다.
경찰대에 응시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아이의 뜻을 물었다.
어렵기로 유명한 경찰대 시험
특히, 문과로서 수학과목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공주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아들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대에 한번 도전 해보겠다고 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 나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즉시 인터넷강의를 신청해 달라고 하더니,
집중적으로 수학을 보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인터넷 강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아이는 꾸준히 학습진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수개월분 책값이 짧은 기간 동안 인터넷 강의료로 지출되었다.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본시험에 대비하여 8월초에 공사시험을 보았다.
공사시험을 치르고 나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결과가 좋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니,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 되었다.
공사시험을 치르고 이틀 뒤
8월7일 날
"수능100일전 다짐대회" 가 소강당에서 열렸다
▲ 수능 100일전 다짐대회 - 강당에서 촛불의식
교장선생님 말씀과 학년부장 선생님의 전망
학부모 대표가 학생들에게 부모의 마음을 전해주고,
학생대표가 그들의 각오를 전했다.
촛불이 앞자리부터 전해져 올 때는 강당전체에 경건함이 배어났다.
동생도 형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기원했다.
2주 뒤엔 경찰대 시험을 치렀다.
몇일후
아침잠에 빠진 내게 또 한번 기분 좋은 소식이 날아 들었다.
이후에도, 체력검사를 비롯하여,
적성검사 때는 앞길의 교통사고로 인한 정체로,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최종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한일고 에서 경찰대 최다합격자 16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수시입학 전형
학년부장 선생님의 분석이 날카로웠다.
확신에 찬 말씀도 이어졌다.
선생님께서는 정시전형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이와 수시로 연락하며 의사를 조율하고,
선생님의 의견을 경청했다.
많은 정보를 찾아보아야 했고, 소신도 필요했다.
입학원서 작성에는
담임 선생님의 많은 수고가 있어야 했다.
자기소개서 작성은 사전연습도 해야했고, 공도 많이 들였다,
글자수가 정해져 있어서, 제한된 지면에 요약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차례 수정을 해가며 애를 썼으나,
수시입학 전형은 노력에 비해 소득이 없었다.
수능성적이 없기 때문에 내신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정시전형에 기대를 걸었다.
다른대학에도 원서접수를 했으나,
정시전형 “나군”에 한번 더 도전하기 위해
응시를 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시전형에 합격하면 정시전형에는 응시를 할 수가 없다.
아이는 빨리 수능시험을 끝내고 푹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몇 번씩 반복해서 책을 보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는 말도 했다.
그때마다 한 문제에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을 해주며
“유종의 미”를 당부했다.
▲ 이것이 당신의 수능 성적표 입니다 라고 쓰인 현수막 - 전과목 1등급을 기원
이윽고
구작 관과 소강당 사이에 교직원과 재학생의
수능대박을 기원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수능시험날
시험이 끝나기 2시간 전쯤 수험장인 공주사대부고를 찾았다.
학교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부모님들도 눈에 띄지 않아
차를 돌려 한일고로 갔다.
새삼스럽게 학교를 골고루 둘러보고,
운동장을 한 바퀴 크게 돌아 다시 사대부고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부모님들도 오시기 시작하고
정문 앞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다른 수험장인 공주고를 둘러보시고 3학년부장
3년간 담임을 맡아주신
전대희 선생님께서 사대부고로 오셨다
두 분도 함께 기다리시며 수능결과를 전망해 주셨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아들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교문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는데,
저만치서 걸어오는 아들이 보였다.
표정이 밝아 보였다.
불안함이 사라졌다.
식사만 하고 아이들을 학교로 빨리 돌려 보내달라는
부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아들이 휴대폰으로 점수를 확인했고, 학교 앞에서 식사를 끝냈다.
학교에 데려다 주고 집에 도착하니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아이들의 탄식과, 기대하는 결과가 나온
아이들의 기쁨 사이에
분위기가 어수선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가라 앉았다고 했다.
아들은 평소에 치렀던 교육평가원 모의 수능 때와
똑 같은 결과가 나왔다.
더도 덜도 아닌 평소와 똑 같아서
실수 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을 삼았다.
수능시험을 마치고 4일째가 되는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 아들녀석은
나에게 생애의 첫 잔을 받았다.
정시전형!- 마지막 결정
아들이 자기의 소신을 밝혔다.
사회과학대 에서 법대로.
이미 한곳이 확정되어 있다는 심리적인 여유도 작용했다
아들이 나중에 후회 하지 않도록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다.
그 뜻을 따르기로 했다.
담임 선생님께 아이의 의견을 말씀 드렸다.
학년부장 선생님은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다.
나도 마음을 비웠다.
문과의 경우
수능성적만으로 입학정원의 2배수를 뽑았다.
하늘의 뜻에 맡기고 발표를 기다렸다.
1차를 통과했다.
가슴이 뛰었다.
논술시험날은
예상치 못한 폭설로 인한 교통혼잡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라고 하였다.
학교 입구 지하철 역에서부터 학교정문 까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마비상태가 되었다고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즉시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뛰라고 했다.
마감 5분전
무사히 입실했다는 아이의 메시지를 받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눈길을 뛰어서 간신히 정각에 입실하였으나,
천재지변으로 시험시간을 연기한다고 하였다.
논술시험이 끝나고
박기운 선생님과
그 추운 눈길을 뚫고 시험장까지
오셔서 덕담을 해 주셨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식사도 못하신 채 그 눈길을 뚫고
다시 학교로 돌아 가셨다고 했다.
다음날 구술시험일은 토요일 이어서 아침 일찍 차로 데려다 주었다.
산으로 둘러 쌓인 새벽공기는 한일고 의 공기처럼 매우 차가웠다.
시험순서를 별도로 추첨을 하였다.
뒤에서 세 번째를 뽑아 오후 1시가 다될 때까지
1층 학부모대기 장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대기장소 한쪽 구석에서 어느 부부가 조용하게,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집 아이가 면접을 끝내고 다가와 뒤에서 엄마를 부를 때까지
그 기도는 계속 되었다.
그 엄마는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맞았다.
시간이 흘러 오후 조 수험생들이 학부모와 함께
긴장 된 모습으로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술시험을 끝내고, 건물 밖에서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뛰어나가 불러 세우니
아이의 얼굴이 비교적 밝아 보였다.
그제서야 허기가 몰려왔다.
늦은 식사를 하며, 아이의 무용담을 들었다.
느낌이 좋았다.
“내신의 장벽을 통과 할 것인가?”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나군” 과는 별도로 “가군” 도 접수를 했다.
아들의 뜻대로 국제학부에 접수를 했다.
신입생 특별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그로부터 6일 후
“나군” 의 최종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
오후 6시!
아이의 흥분된 목소리가 낭보를 알려왔다.
내신50%, 논술30%, 구술20% 라는 2차 시험의 장벽을
논. 구술로 뒤집었다.
정시 때까지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고 하시던
선생님 말씀의 위력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긍정의 힘!
3년 전 입학 할 당시와 아들이 졸업 한 현재
학부모로서 나의 생각은 다름이 없다.
여타의 자사고 나 특목고가 남녀공학인 점을 감안해 보면,
한일고의 교육환경은 최소한의 일탈 가능성 마저 도
염려 할 필요가 없는 학교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선생님들의 노력까지 더해져,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공부하는 환경에 관한 한,
한일고는 국내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들이 적응을 잘 한다는 가정하 에서 그렇다.
▲ 아이들의 3년간 노력이 배어있는 “구작관” 전경
부모와 떨어져 지내면서,
자신의 판단과 결심으로 홀로서야 하는 과정을 겪었고,
3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후배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생활의 기본을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도
교육적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들을 보면
입학 때와 졸업한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순히 흘러간 세월 탓이 아니다.
훌쩍 커 버린 키보다 내면이 더 많이 변화 되었다.
대인관계에 임하는 사고의 틀이 바뀌었다.
우선 남을 배려 하려 하고,
의견의 양면을 보려 한다.
세상에는 나 보다 잘난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정을 둘러싼 자연 속 에서,
자연을 닮은 마음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럽다.
그것이 한일고의 힘이다.
나는 학교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아이들의 노력과 바램을 볼 수 있었다.
설립자 묘소 앞 나무에 걸어둔 아이들의 명찰을 보며,
힘들 때마다 뒷산에 올라 마음을 추슬렀을
아이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 설립자 묘소 앞에 걸어 놓은 아이들의 명찰
학교 뒷산으로 오르는 길섶에는
아이들이 희망을 담아 쌓아 올렸을 돌탑들도 보인다.
“긍정의 힘”을 믿고
노력한 한일고 졸업생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학부모로서 나도 한일고를 사랑했다.
나는 아들에게
한일고 보다 더 나은 교육환경은 이 땅에 없다고 말해왔다.
진심으로 그랬다.
아들도 내 말이 진실임을 안다.
2학년 초,
전학문제로 술렁거렸을 때도,
그래서 아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최고의 교육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굳게 믿었다.
아들이 3학년 이었던 어느 가을날
학교를 둘러보고 조용히 내려 오던 길이었다.
학교는 무척 조용했다.
기숙사 C동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한 학생이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물론 시킨 사람도 없다.
주위의 소리에 돌아 보지도 않는다.
한일고의 미래는 밝을 수 밖에 없다.
한일고를 거쳐가는 이들이 모두 행복한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아들은
대학입시에서 분에 넘치는 행운을 얻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3년 전 한일고의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가 더 기뻤다고 했다.
맑은 하늘과 청량한 공기, 언제나 고즈넉한 교정의 눈익은 풍광들
학교를 찾을 때 마다 인사하던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이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아이들을 위해 노력해 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한일고 19기
송요훈 의 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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