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출간하신 『아버지의 특별한 편지』를 잘 읽어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아들에게 편지를 쓰시게 되었나요?
우리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많이 힘들어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열심히 하고 있는 널 보니 참 대견하다, 는 내용의 편지를 한 번 썼습니다. 진심이 담긴 편지라 그랬는지 아이가 감동하더군요. 그전에도 몇 번 아들에게 주는 글을 썼지만 편지라고 하긴 좀 그런 내용들이었지요. 초등학교 때 가족신문을 만드는 과제가 있으면 거기에다 몇 자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내용으로 쓴 것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런 차에 모 일간지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공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쓴 글을 보게 됐습니다. 말로 이래라저래라 하게 되면 간섭처럼 들리지만 글자로 생각을 서로 교류하는 것은 전혀 저항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게 편지의 장점이자 힘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면 애가 바로 바로 달라지거든요. 그렇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깊어지고, 저는 바르게 커가는 아들을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어 정말 행복합니다. 편지는 정말 강합니다.
말로 하는 것과 편지로 쓰는 것이 확실히 차이가 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럼요. 말로 하면 효과가 단기적이지만 편지는 장기적입니다. 말로 반복하면 잔소리가 되지만 편지를 계속 읽으면 훌륭한 교훈이 됩니다.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튀어나와 아이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편지는 이런저런 교훈을 통해 에둘러 말하니 아이가 자존심 상할 일도 없고 오히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세심히 파악하려 합니다. 사실 우리 아들이 방 정리를 잘 안 하는 편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돼지우리냐, 라는 핀잔보다는 ‘관리’라는 주제를 가지고 편지를 씁니다. 관리라는 글자의 ‘관’(管)자는 대나무 마디를 뜻한다, 한 마디 뒤에 다시 한 마디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대나무의 마디처럼 깔끔하게 방 정리를 잘하는 관리자가 되면 앞으로 공부도 잘하고 대나무처럼 올곧은 삶을 살 수 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씁니다. 방청소의 문제는 물론 인생의 관리, 라는 그럴듯한 내용까지 담으니 일석이조의 덕을 볼 수 있죠.
그렇군요. 책에 실린 편지를 보니 인용하신 글들이나 예시가 보통 이상이더군요. 제가 읽어도 가슴에 담을 만한 말들이 많았습니다. 평소 독서를 많이 하시는 편이신가요?
책을 좀 보는 편이에요. 개인적인 이유로 책을 보기도 하지만 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책을 많이 봅니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서로 할 얘기가 별로 없어요. 밥 먹었냐, 공부는 잘하고 있니, 라는 정도 밖에는 할 말이 없지요. 자식도 아버지가 묻는 말에 억지로 네, 네 몇 번 대답하면 끝입니다. 그런 대화는 정말 어색하죠. 자식과의 진정한 대화를 원한다면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런 사실을 절감하게 된 게 우리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였지요. 아들이 다녔던 공주 한일 고등학교는 1년에 몇 십 권씩 읽을 책을 정해줍니다. 우리아이가 먼저 읽으면 다음에 내가 읽고, 내가 먼저 읽으면 아들이 다음에 정해진 책을 읽습니다. 학교에 면회를 가면 책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대화 소재가 떨어지지 않겠네요.) 그렇죠. 되게 재미있습니다.
청소년 때에는 공부 외에 주변의 유혹이 많아 부모님들이 생활지도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더군요. 그 면에서는 어떠셨는지요?
일일이 지도하고 관리한다고 해서 주변의 유혹이 없어지겠습니까? 문제는 뚜렷한 목표 의식입니다.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목표가 없으면 생활의 패턴이 느슨해지고, 그렇게 되면 유혹에 쉽게 넘어 갑니다. 아들한테 제가 그랬습니다. 네가 만일 한일 고등학교를 목표로 잡았으면 너는 앞으로 잠자는 시간을 한 시간 정도 줄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중3 때였을 때 주변에서 같이 담배 피자고 주위에서 많이 요구를 하더구나. 너도 주위에서 그런 유혹을 많이 받지? 그러나 유혹보다는 너의 목표를 생각해라. 지금 당장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도 될 것을 네 스스로 판단해보아라. 하지마 라고 강요하는 것보다 목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주면 알아서 자기의 생활을 조절합니다. 아이의 의식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데에는 목표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바라는 목표가 아닌, 아이가 선택한 목표여야 합니다.

부모의 목표가 아닌 자식의 목표라는 말씀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방식의 문제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주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 애들이 몇이나 있나요?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생물학과를 가야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게 우리 교육의 문제점입니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죠.
아버지로서 자부심이 가장 컷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한일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최종 합격증을 받던 날이 기억납니다. 제가 학교에 직접 가서 합격증을 받았거든요. 서울대 법대 간 것보다 전 그게 더 기뻤습니다.
그 때 “지금 한일고 교정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라는 문자를 보내셨다는데……. 편지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감성적인 것 같습니다.
그때도 오늘처럼 비가 왔습니다. 요훈이가 한일 고등학교에 아주 어렵게 들어갔어요. 그 학교는 아주 엄격하게 아이들을 선발합니다. 그것도 오랜 기간을 두고요. 40명씩 4번을 뽑습니다. 요훈이는 2차부터 접수를 했지요. 마지막 4차 40명 중 30명을 뽑고 남은 건 10명이었죠. 여름부터 12월 초까지 온 가족이 거기에 매달렸는데 떨어지면 어쩌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당락의 문제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 요훈이가 마음에 어떤 상처를 받을 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집사람으로부터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훈이에게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냈죠. 아들이 전화를 해서 진짜냐고 묻더군요. 우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바로 차를 몰고 합격증을 받으러 한일 고등학교로 갔습니다. 교정에 내렸더니 비가 오더군요. 그래서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라고 문자를 보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비였습니다. 요훈이의 눈물 같기도 하고…….
사립 기숙 고등학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굉장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그런 결과를 얻지 않았더라도 기숙 시스템에 만족합니다. 교육비 차원에서도 효율적입니다. 일반 고등학교에 비해 돈이 더 들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교육비를 생각하면 훨씬 경제적입니다. 아이들 스스로도 실력으로 승부하려는 분위기가 있어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교육시스템을 맡고 계신 현직 선생님들도 너무 인간적이고 책임감이 강하십니다.
아들을 위해 입시정보와 학교 사정까지 알아보는 세심한 아버지가 그리 많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에 비추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첫째는 자녀의 성격과 성정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깎아도 안 될 나무를 아무리 열심히 깎고 있어 본들 깎는 사람도 힘들고, 깎기는 나무도 힘들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무로 집을 짓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나무로 집을 지어도 괜찮을 토양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땅을 파보니 그 밑이 바위인데 거기다 아무리 나무로 집을 세운들 제대로 세워지겠습니까? 바위가 있으면 벽돌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 파악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대다수의 부모님들이 그걸 안 합니다. 나무로 집을 세우고 싶은 건 부모의 기대일 뿐입니다. 아이의 성정은 건축인데 무조건 의대를 가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둘째는 아이들하고 친해지려면 공부 외에 주변적인 상황과 그들이 즐기는 문화와 필요한 정보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아이가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모릅니다. 그러면서 공부 잘하라고 말하는 건 난센스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한일고를 가겠다고 마음먹기까지 3개월 동안 인터넷서핑을 했습니다.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다 제공했지요. 선택은 너의 몫이다, 네가 그 학교가 싫다면 다른 곳의 정보도 얻어주겠다고 했지요. 정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자식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일방적 희망만 가지고 조급하게 대화하면 아이가 부담을 느낍니다. 아이에 대한 성격이나 능력 파악, 주위 정보도 모른 채 마음만 앞서면 관계가 아주 이상해집니다. 지나친 거 아니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아들과 얘기할 때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자주 읊조립니다.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옛 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 미칠가”라는 식으로. 그러면 아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습니다. 나도 너처럼 고등학교 다녔어, 라고 말하면서 이런 저런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세심함이란 바로 그런 겁니다.
그렇게 세세히 신경을 쓰려면 많은 시간 투자가 필요할 것 같은데 혹시 그런 연유로 사회 활동에 지장을 받으신 적은 없나요?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주말에 서울에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면 제가 학교까지 태워다 줬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그게 뭐 별거냐,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더군요. 월요일에 출근하면 그 여파가 옵니다. 그러면 회사 일에 다소 영향이 갑니다. 동료들과의 술자리 참석도 줄다 보니 그것도 약간 걸리기는 했습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렸지만 나와의 대화나 편지로 아이가 변화되는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겁니다. 뭐, 아버지의 운명이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책에 실린 편지에서 아들이 가장 감동을 받은 게 어떤 겁니까?
요훈이가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다,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고 하더군요. 전 그날 늦게까지 회사에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나오다가 집사람 전화를 받았지요. 회사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편지를 써서 출력을 했습니다. A4 용지를 접지 않고 봉투에 그대로 넣었지요. 전 한번도 편지를 접어서 넣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우리 요훈이 앞날에 접히는 일이 생길까 봐서. (웃음) 그 때 시간이 2시 30분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들고 학교로 갔습니다. 도착하니까 새벽 4시더군요. 강의동을 보니까 문과 교실 두 곳에 불이 켜져 있더라고요. 혹시나 요훈이가 공부를 하나, 하고 봤더니 우리 아이는 없고 2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졸릴까봐 서서 책을 보고 있더군요. 안쓰러운 마음에 들어가서 자야지, 하니까 시험공부를 많이 못해서 그렇다며 계속 책을 보더군요. 차에 가서 6시까지 기다렸다가 기숙사로 올라갔습니다. 사워를 마치고 팬티 바람으로 나오는 요훈이를 만났습니다. “어, 아빠.”하면서 놀라더군요. 너 아프다고 해서 왔다. 그리고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편지를 전해주고 그 길로 출근을 했습니다. 편지를 읽어봤겠죠. 2학년 2학기 때 성적을 평가해서 3학년 장학생을 선발하는데 그 때 장학생이 되더라고요. 「Both Sides Now」라는 팝송 가사를 인용해서 쓴 편지였죠. 인생에는 양면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가 가장 기억이 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라도 그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편지를 쓰시나요?
예전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다고 생각해서 편지는 쓰지 않습니다. 이제는 할 얘기가 있으면 맥주 마시면서 합니다. 쓸려면 이제 둘째 아들을 위해 써야겠죠.
아버지 이야기만 많이 했는데, 어머니는 어떠셨나요?
사실 집 짓기에 비유하자면, 땅을 다지는 일은 집사람이 다했죠. 저는 폼만 잡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아이의 성격을 살려주면서도 해야 할 것을 하게 만들어 준 것 집사람입니다.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혔지요. 그래서 또래의 아이들보다 독서량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반강제적으로 읽히더군요. 읽히고, 내용을 물어보고, 독후감 쓰라고 독촉을 했습니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런 강제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때 토양이 다져져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요훈이를 만든 것의 반 이상이 다 집사람입니다. 나만 포장이 돼있는 길을 느긋하게 달렸을 뿐입니다. 편지 몇 장 쓰고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게 되니 왠지 쑥스럽습니다.
입시를 위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아버지의 입장으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목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막연한 목표는 목표가 아닙니다. 나는 소방관이 돼야겠다, 라는 목표를 가졌다고 합시다. 그러한 목표에 대해 누군가 “왜?”냐고 물으면 그 물음에 구체적으로 조리 있게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요”라든지 “불 끄는 게 좋아서요.” 혹은 “나랑 맞는 것 같아서요”라는 피상적인 답 말고 본인의 기질과 성격과 사회적인 전망과 자기만족, 앞으로의 인생 계획 등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서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자기 좌표가 설정되면 인생의 반은 성공한 겁니다. 생생하고 구체적인 꿈과 목표를 세우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달리지 않는다면 채찍이 필요 없다’는 편지글이 생각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꿈을 향해 달리는 학생들에게 『아버지의 특별한 편지』가 좋은 채찍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장시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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